며칠 전 집에서 묵은 짐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초등학교 시절 성적표를 발견했다. 낱장으로 접혀 있던 그 종이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는데, 문득 이걸 모으는 사람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몇 년 전부터 한국성적표지를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 처음엔 그저 학창 시절 추억을 되새기려는 의도였지만, 점점 빠져들면서 각 시기별 디자인 변화나 학교별 양식 차이에 눈을 뜨게 되었다.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종이 성적표는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대부분의 학교가 온라인 기록 시스템으로 전환하면서, 더 이상 학생들이 손에 쥐는 성적표는 박물관 유물이 되어 가는 중이다. 실제로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의 통계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전국 초중고의 95% 이상이 성적을 전산으로만 관리하고 있다. 이런 추세 속에서 예전 성적표는 희소성이 높아지고,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나름의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전교 등수가 적힌 성적표는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5만 원 이상에 거래되기도 한다. 한 중고거래 플랫폼에서 ‘성적표 수집’ 카테고리가 따로 생길 정도로 수요가 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내가 처음 성적표 수집에 관심을 가진 건 우연한 계기였다. 지방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곤 했는데, 문득 부모님이 보관해 주셨던 내 성적표를 찾아보게 되었다. 1990년대 초반 것인데, 당시엔 ‘수’, ‘우’, ‘미’, ‘양’, ‘가’로 표기하던 시절이라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때부터 인터넷 중고거래 사이트나 지역 번개장터를 뒤지기 시작했다. 특히 지방 중소도시의 재래시장 헌책방에서 예상치 못한 수집품을 발견할 때가 많다. 한번은 대전의 한 헌책방에서 1970년대 국민학교 성적표 뭉치를 1만 원에 샀는데, 그중에는 한 학생의 6년치 성적표가 모두 들어 있어 소장 가치가 높았다.
수집을 하다 보면 각 시대의 교육 철학이 성적표에 그대로 녹아 있다는 걸 느낀다. 1970년대 성적표는 ‘국민학교’라는 명칭과 함께 ‘도덕’ 과목이 독립적으로 존재했다. 1990년대로 넘어오면서 ‘인성’ 관련 항목이 추가되고, 2000년대 이후에는 ‘창의적 체험활동’ 같은 영역이 생겼다. 이 변화를 쫓다 보면 한국 교육의 흐름이 한눈에 들어오는 재미가 있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성적표에는 ‘반공’ 관련 항목이 있던 학교도 있었는데, 이는 당시 군사정권의 이념 교육을 반영한다. 반면 2000년대 이후 성적표는 ‘다문화 이해’ 같은 항목이 등장해 사회 변화를 보여준다.
특히 흥미로운 건 1980년대 중반에 잠깐 유행했던 ‘상대평가’ 성적표다. 당시 전교 등수와 석차백분율을 상세히 기재했던 학교들이 있었는데, 이는 지금은 개인정보 문제로 사라진 방식이다. 한국교육개발원의 연구 자료에 따르면, 1990년대 후반부터 석차 공개가 점차 금지되면서 성적표 양식이 크게 바뀌었다고 한다. 이런 배경을 알면 수집품 하나하나가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실제로 내 컬렉션 중 1985년 서울의 한 중학교 성적표는 전교 등수와 반 등수가 모두 적혀 있어, 당시의 경쟁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해준다. 반면 1998년 성적표는 석차 대신 ‘상위 10%’ 같은 구간만 표시되어 있어, 제도 변화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현재 내 컬렉션은 약 120점 정도다. 주로 196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초중고 성적표가 주를 이루고, 대학 성적표도 몇 장 있다. 가장 귀한 것은 1962년도 국민학교 성적표인데, 당시엔 ‘읽기’, ‘쓰기’, ‘셈하기’ 같은 기초 과목만 있었다. 역시 가장 아끼는 작품(?)이다. 이 성적표는 종이 질감이 지금과 달라서, 갈변된 상태가 오히려 고풍스럽다. 또한 1970년대 성적표 중에는 ‘가정통신문’이 함께 붙어 있는 경우도 있는데, 여기에는 당시 학교 행사나 주의사항이 적혀 있어 사회사 자료로서도 가치가 있다.
수집가로서 아쉬운 점은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성적표 수집은 국내에서 매우 마이너한 분야라 관련 커뮤니티나 레퍼런스가 거의 없다. 네이버 카페에 몇몇 동호인이 있긴 하지만 활성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소장품을 스캔해서 분류하고, 각 시기별 특징을 정리하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지금은 방문자가 많지 않지만, 언젠가는 비슷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최근에는 일본의 ‘통지표’ 수집가와 교류하게 되었는데, 일본은 한국보다 성적표 수집이 더 발달해 있어 많은 참고가 된다. 일본에서는 성적표를 ‘통지표’라 부르며, 1900년대 초반의 통지표도 거래되는 등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최근에는 요즘 세대의 성적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온라인 출력본이지만 종이로 뽑으면 나름의 매력이 있다. 특히 코로나19 시기 원격수업 성적표는 ‘출석’ 항목이 ‘온라인 접속’으로 대체되는 등 특이한 기록을 남겼다. 앞으로 10년, 20년 후에는 이런 성적표도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지 않을까. 예를 들어, 2020년 한 초등학교의 성적표에는 ‘온라인 수업 참여도’라는 항목이 추가되었고, ‘체육’ 과목이 ‘가정 운동’으로 대체된 사례도 있다. 이는 팬데믹이 교육에 미친 영향을 보여주는 독특한 자료다.
수집을 하면서 느끼는 점은, 우리가 흔히 지나치는 문서 하나하나가 시대를 담은 타임캡슐이라는 것이다. 성적표는 단순한 점수 기록이 아니라 그 시대의 교육 제도, 사회 분위기, 심지어 인쇄 기술까지 보여준다. 예를 들어, 1960년대 성적표는 활자 인쇄가 대부분이었지만, 1980년대 이후로는 타자기나 컴퓨터 출력본이 등장한다. 또한 성적표에 사용된 종이의 질도 시대에 따라 달라져, 1970년대에는 재생지를 사용한 학교도 있었다. 앞으로도 꾸준히 모아서, 나만의 작은 기록 보관소를 만들어 갈 생각이다. 관심 있는 분이 있다면 댓글로 교류해 주시길.